아비뇽 연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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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비뇽 연극제는 1947년 장 빌라르에 의해 창설된 프랑스의 연극 축제이다. 매년 7월에 열리는 이 축제는 '인(IN)'과 '오프(OFF)'라는 두 개의 독립적인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극, 발레, 뮤지컬, 무용 등 다양한 공연을 선보인다. 아비뇽 연극제는 1968년 5월 혁명, 2003년과 2014년의 파업 등 사회적, 정치적 쟁점과도 관련되어 있으며, 장 빌라르의 작품과 공연 기록은 장 빌라르 관에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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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 연극제 | |
---|---|
기본 정보 | |
![]() | |
종류 | 공연 예술 축제 |
위치 | 아비뇽 |
국가 | 프랑스 |
시작 연도 | 1947년 |
창립자 | 장 빌라르 |
날짜 | 매년 7월 |
장소 | 아비뇽의 궁전 안뜰 아비뇽 시내의 다른 여러 장소 |
이전 명칭 | 아비뇽 드라마 예술 주간 (Semaine d'art dramatique en Avignon) |
공식 웹사이트 | www.festival-avignon.com |
조직 | |
조직 유형 | 공공 기관 (Établissement public) |
이사회 의장 | 플뢰르 펠르랭 (Fleur Pellerin) |
감독 | 티아고 로드리게스 (Tiago Rodrigues) |
재정 | |
예산 | 1550만 유로 (2023년) |
통계 (2023년) | |
티켓 판매 | 130,000장 |
총 관람객 수 | 145,000명 |
전문 관람객 수 | 8,700명 |
언론인 수 | 630명 |
공연 횟수 | 415회 |
공연 작품 수 | 51개 |
기타 | |
오프 (Off) 축제 | 아비뇽 오프 축제 |
2. 역사
1947년 장 빌라르는 아비뇽 교황청에서 T. S. 엘리엇의 대성당의 살인을 공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교황청 명예의 뜰이 너무 넓고 "형편없는" 공간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대신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 폴 클로델의 '토비와 사라', 모리스 클라벨의 '정오의 테라스'를 제안했다. 같은 시기, 미술 평론가 크리스티앙 제르보스와 시인 르네 샤르는 현대 회화 및 조각 전시회를 열었다.
1947년 9월, 첫 아비뇽 연극제는 알려지지 않은 작품과 현대적인 대본을 선보이는 장으로 시작되었다. 초기 성공 후, 장 네그로니, 제르멘 몬테로, 알랭 퀴니, 미셸 부케, 장-피에르 조리스, 실비아 몽포르, 잔 모로, 다니엘 소라노, 마리아 카사레스, 필립 누아레, 모니크 쇼메트, 장 르 풀랭, 샤를 데네르, 장 데샹, 조르주 윌슨, 제라르 필리프 등 많은 젊은 배우들이 참여했다.
축제는 비판 속에서도 성장했다. 빌라르의 "대중 연극" 아이디어는 그를 "스탈린주의자", "파시스트", "포퓰리스트", "코스모폴리탄" 등으로 칭하는 비판을 받았다.
1960년대에는 연극 관행을 혁신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1966년 앙드레 베네데토와 베르트랑 위로는 비공식적이고 독립적인 "오프" 축제를 카르메스 극장에서 개최했고, 이듬해 다른 극단들이 합류했다. 1967년 빌라르는 '교황 궁 명예의 뜰' 축제를 시작했고, 이후 축제 공연 장소가 다양해졌다.
빌라르는 1971년 사망할 때까지 축제를 감독했으며, 그해 "인" 축제에는 38개의 쇼가 포함되었다.
1991년 사무엘 베케트 사후 2년 뒤, 프랑스 판사는 여성 출연진의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을 허용했다. 단, 베케트 대리인의 이의 제기가 공연 전에 낭독되어야 했다.[1]
2. 1. 창립 (1947)
1947년 예술 평론가 크리스티앙 제르보스와 시인 르네 샤르는 아비뇽 교황청에서 현대 미술 전시회를 기획했다. 이들은 장 빌라르에게 T. S. 엘리엇의 대성당의 살인을 상연할 것을 요청했으나, 빌라르는 이를 거절하고 대신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 모리스 클라벨의 '정오의 테라스', 폴 클로델의 ''토비와 사라의 이야기'' 세 편의 연극을 제안했다.[1]1947년 9월, 첫 번째 '아비뇽 연극제'는 알려지지 않은 작품과 현대적인 대본을 선보이는 장으로 시작되었다. 초기 성공 후, 이 축제는 많은 젊은 인재들이 참여하며 성장했다. 빌라르가 초청한 배우들 중에는 장 네그로니, 제르멘 몬테로, 알랭 퀴니, 미셸 부케, 장-피에르 조리스, 실비아 몽포르, 잔 모로, 다니엘 소라노, 마리아 카사레스, 필립 누아레, 모니크 쇼메트, 장 르 풀랭, 샤를 데네르, 장 데샹, 조르주 윌슨, 제라르 필리프 등이 있었다.
2. 2. 초기 (1947-1971)
1947년 장 빌라르에 의해 창설된 아비뇽 연극제는 처음에 크리스티앙 제르보스와 르네 샤르가 기획한 현대 미술 전시회에서 시작되었다. 빌라르는 T. S. 엘리엇의 대성당의 살인을 공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2세, 모리스 클라벨의 '정오의 테라스', 폴 클로델의 ''토비와 사라의 이야기'' 세 작품을 제안했다.[1]아비뇽 교황청의 명예의 뜰이 너무 넓고 "형편없는" 공간이라고 생각한 빌라르는 초대를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세 작품을 제안했고, 1947년 9월에 열린 첫 번째 '아비뇽 연극제'는 알려지지 않은 작품과 현대적인 대본을 선보이는 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초기 성공 후, 축제에는 장 네그로니, 제르멘 몬테로, 알랭 퀴니, 미셸 부케, 장 피에르 조리스, 실비아 몽포르, 잔 모로, 다니엘 소라노, 마리아 카사레스, 필립 누아레, 모니크 쇼메트, 장 르 풀랭, 샤를 데네르, 장 데샹, 조르주 윌슨, 제라르 필리프 등 많은 젊은 배우들이 참여했다.
축제는 때때로 격렬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빌라르의 "대중 연극"에 대한 아이디어는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비평가들은 빌라르를 "스탈린주의자", "파시스트", "포퓰리스트", "코스모폴리탄" 등으로 칭하기도 했다.
1966년에는 앙드레 베네데토와 베르트랑 위로가 공동 설립한 비공식적이고 독립적인 "오프" 축제가 카르메스 극장에서 개최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1967년 빌라르는 '교황 궁 명예의 뜰' 축제를 시작했고, 이후 축제 공연을 위한 장소가 다양하게 추가되었다.
빌라르는 1971년 사망할 때까지 축제를 감독했다. 같은 해, 빌라르의 "인" 축제에는 38개의 쇼가 포함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7년, 배우이자 연출가인 장 빌라르(Jean Vilar)가 아비뇽 교황청 앞뜰에서 야외 연극을 제안했고, 이에 동의했다. 빌라르는 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연극을 목표로 했다.
1947년 9월 4일부터 10일까지 열린 첫 공연은 빌라르가 관객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젊은이들에게 호평을 받아, 여름에 빠질 수 없는 행사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빌라르, 잔 모로, 미셸 부케, 마리아 카사레스, 필립 누아레, 조르주 윌슨, 제라르 필립 등이 출연했다.
1951년부터 1963년까지 빌라르는 파리 국립 민중 극장(Théâtre National Populaire)의 지배인을 겸임했기에, 페스티벌은 옛 교황청 앞뜰에서 국립 민중 극장 단원들에 의해 공연이 이루어졌다.
1964년부터는 다른 연출가들도 초청했다. 1966년에는 모리스 베자르의 『20세기 발레단』(Ballet du XXe siècle)을 초청했고, 1967년에는 고다르의 영화 『중국 여인』을 개봉 전에 상영하기도 했다. 공연장도 늘어갔다.
1968년에는 5월 혁명의 여파가 페스티벌에 미쳤고, 빌라르는 학생들의 항의와 논쟁에 휘말렸다. 그는 1971년에 사망했다.
2. 3. 발전과 변화 (1966-2003)
1964년 아비뇽 연극제 기간에 앙드레 베네데토의 자율 공연이 '오프'의 시초로 여겨진다. 1966년 아비뇽의 카르메스 극장은 앙드레 베네데토와 베르트랑 위로가 공동으로 설립하여 비공식적이고 독립적인 "오프" 축제를 개최했다.[1] 이듬해, 베네데토의 극장에는 다른 유사한 극단들이 합류했다.[1]"오프"의 도전에 대응하여, 1967년 장 빌라르는 '교황 궁 명예의 뜰' 축제를 시작했다.[1] 그 후, 축제의 연극 공연을 위해 수많은 추가 장소가 선택되었다.[1]
1968년에는 5월 혁명의 여파가 페스티벌에 미쳤고, 빌라르는 학생들의 항의와 논쟁에 휘말렸다. 그는 1971년에 사망했다.[2]
1991년, 사무엘 베케트가 사망한 지 2년 후, 프랑스 판사는 여성 출연진의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이 베케트의 유산에 과도한 피해를 입히지 않을 것이라고 판결하고, 브뤼 드 베통 극단의 여성 출연진에 의한 연극 공연을 축제에서 허용했다. 비록 베케트의 대리인의 이의 제기가 각 공연 전에 낭독되어야 했지만 말이다.[1]
한편, 2003년 아비뇽 연극제는 실업 보장법 개정에 반대하는 파업으로 인해 중단되었다.[2] 1971년에는 38편의 작품이 상연되었고, 2004년에는 667편, 2007년에는 876편으로 해마다 활발해지고 있다.[2]
1982년 이후 오프는 알랭 레오나르(Alain Léonard) 디렉터의 '아비뇽 퍼블릭 오프(Avignon Public Off)' 협회가 종합 프로그램을 편집·배포했다.[2] 또한, 선구자 앙드레 베네데토의 '아비뇽 페스티벌과 참가 단체(Avignon Festival et Compagnies)' 조합이 2006년과 2007년의 참가 단체와 공연장을 정리하여, 2008년의 참가 신청을 받고 있다.[2]
2. 4. 현대 (2004-현재)
2003년, 오르탕스 아르샹보와 뱅상 보드리예가 공동 디렉터로 임명되어 해마다 고문(artiste associé)을 초청하고 있다. 2004년에는 토마스 오스터마이어(Thomas Ostermeier)가 초청되었고, 2005년에는 얀 파브르(Jan Fabre), 2006년에는 조제프 나지(Josef Nadj), 2007년에는 프레데릭 피스바흐(Frédéric Fisbach)가 초청되었다. 2013년부터는 올리비에 피(Olivier Py)가 디렉터를 맡고 있다.한편, 2003년에는 실업 보장법 개정에 반대하는 파업으로 인해 연극제가 중단되기도 했다.
1964년 앙드레 베네데토의 자율 공연은 '오프'의 시초로 여겨진다. 이후 1971년 38편, 2004년 667편, 2007년 876편의 작품이 상연되는 등 오프는 해마다 활발해지고 있다.
1982년부터 오프는 알랭 레오나르 디렉터의 '아비뇽 퍼블릭 오프(Avignon Public Off)' 협회가 종합 프로그램을 편집·배포하고 있다. 또한, 앙드레 베네데토의 '아비뇽 페스티벌과 참가 단체(Avignon Festival et Compagnies)' 조합은 2006년과 2007년의 참가 단체와 공연장을 정리하고, 2008년 참가 신청을 받았다.
3. 구성
아비뇽 연극제는 7월에 3~4주간 열리며, '인'(IN)과 '오프'(OFF)라고 불리는 두 개의 조직이 서로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인'은 초청제 형식으로, 교황 궁전을 포함한 여러 장소에서 공연이 이루어진다. '오프'는 자율 공연제 형식으로, 시내외 극장, 체육관, 교회, 카페, 차고 등 다양한 장소에서 공연이 열린다.[1]
공연은 연극, 발레, 뮤지컬, 영화 · 콘서트, 무용, 컨템포러리 댄스, 마리오네트, 마임, 기마 오페라 · 서커스 · 거리 공연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른다.[1]
2007년 '오프'에서는 약 120개의 장소에서 876건의 공연이 개최되었다. '오프'는 홍보가 자유롭기 때문에 거리에 포스터가 붙여지고 "가두 선전" 행렬이 오간다.[1]
3. 1. 인(IN)
7월에 3~4주간 열리는 '인'(IN) 페스티벌은 교황 궁전의 "Cour d'Honneur"(명예 안뜰)를 포함한 여러 장소에서 공연된다. '인'은 초청제 형식으로 운영된다.[1]공연은 연극, 발레, 뮤지컬, 영화·콘서트, 무용, 컨템포러리 댄스, 마리오네트, 마임, 기마 오페라·서커스·거리 공연 등 폭넓게 이루어진다.[1]
2007년 '인'에서는 객석 수 약 2000석의 아비뇽 구 교황청 앞마당 메인 공연장 외 18개 장소에서 34개의 공연이 상연되었다.[1]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7년, 배우이자 연출가인 장 빌라르(Jean Vilar)가 아비뇽 교황청 앞뜰에서 야외 연극을 제안했고, 이에 동의했다. 빌라르는 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연극을 목표로 했다.[1]
1947년 9월 4일부터 10일까지 열린 첫 공연은 빌라르가 관객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젊은이들에게 호평을 받아, 여름에 빠질 수 없는 행사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빌라르, 잔 모로, 미셸 부케, 마리아 카사레스, 필립 누아레, 조르주 윌슨, 제라르 필립 등이 출연했다.[1]
1951년부터 1963년까지 빌라르는 파리 국립 민중 극장(Théâtre National Populaire)의 지배인을 겸임했기에, 페스티벌은 옛 교황청 앞뜰에서 국립 민중 극장 단원들에 의해 공연이 이루어졌다.[1]
1964년부터는 다른 연출가들도 초청했다. 1966년에는 모리스 베자르의 『20세기 발레단』(Ballet du XXe siècle)을 초청했고, 1967년에는 고다르의 영화 『중국 여인』을 개봉 전에 상영하기도 했다. 공연장도 늘어갔다.[1]
1968년에는 5월 혁명의 여파가 페스티벌에 미쳤고, 빌라르는 학생들의 항의와 논쟁에 휘말렸다. 그는 1971년에 사망했다.[1]
역대 디렉터는 다음과 같다.[1]
기간 | 이름 |
---|---|
1947년 - 1971년 | 장 빌라르 |
1971년 - 1979년 | 폴 퓌오(Paul Puaux) |
1980년 - 1984년 | 베르나르 페브르 다르시에(Bernard Faivre dArcier) |
1985년 - 1992년 | 알랭 크롬베크(Alain Crombecque) |
1993년 - 2003년 | 베르나르 페브르 다르시에 |
2003년 - | 오르탕스 아르샹보(Hortense Archambault)와 뱅상 보드리예(Vincent Baudriller) |
2004년 | 토마스 오스터마이어(Thomas Ostermeier) |
2005년 | 얀 파브르(Jan Fabre) |
2006년 | 조제프 나지(Josef Nadj) |
2007년 | 프레데릭 피스바흐(Frédéric Fisbach) |
2013년 - | 올리비에 피(Olivier Py) |
2003년 '인'은 실업 보장법 개정에 반대하는 파업으로 인해 중단되었다.[1]
3. 2. 오프(OFF)

"오프" 페스티벌은 주로 극단으로 구성된 비영리 단체에 의해 조직되며, 극장, 학교, 거리 및 공연에 적합한 모든 장소에서 공연된다.
7월에 3~4주간 열린다. '인'(IN)과 '오프'(OFF)라고 불리는 두 개의 조직이 서로 독립적으로 병립하고 있다. '인'은 초청제, '오프'는 자율 공연제이다. '인' 사무국은 스스로를 '인'이라고 칭하지 않지만, '오프'의 활동가를 초청한 적이 있다. 역사는 '인' 쪽이 더 오래되었다.
공연은 연극, 발레, 뮤지컬, 영화 · 콘서트, 무용, 컨템포러리 댄스, 마리오네트, 마임, 기마 오페라 · 서커스 · 거리 공연 등 폭넓게 이루어진다.
2007년 '인'에서는 객석 수 약 2000석의 아비뇽 구 교황청(팔레 데 파프(Palais des Papes)) 앞마당 메인 공연장 외 18개 장소에서 34개의 공연이 상연되었다. 같은 해 '오프'에서는 시내외 극장·체육관·교회·카페·차고 등 약 120개의 장소에서 876건의 공연이 개최되었다. '오프'는 홍보가 자유롭기 때문에 거리에 포스터가 붙여지고 "가두 선전" 행렬이 오간다.
1964년 연극제 기간에 앙드레 베네데토(André Benedetto)의 자율 공연이 '오프'의 시초로 여겨지며, 이후 1971년에는 38편, 2004년에는 667편, 2007년에는 876편으로 해마다 활발해지고 있다.
1982년 이후 오프는 알랭 레오나르(Alain Léonard) 디렉터의 '아비뇽 퍼블릭 오프(Avignon Public Off)' 협회가 종합 프로그램을 편집·배포했다. 또한, 선구자 앙드레 베네데토의 '아비뇽 페스티벌과 참가 단체(Avignon Festival et Compagnies)' 조합이 2006년과 2007년의 참가 단체와 공연장을 정리하여, 2008년의 참가 신청을 받고 있다.
4. 한국과의 관계
아비뇽 연극제는 한국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일본 극단 및 예술가들이 '인(IN)'과 '오프(OFF)' 두 부문에 걸쳐 꾸준히 참가해왔다.
'인(IN)' 부문에서는 1994년 관세 이에오, 아사미 신슈 등이 참여한 창작극 '스사노오' (테시가와라 사부로 연출)를 시작으로, 2014년과 2017년에는 SPAC-시즈오카현 무대예술센터가 각각 '마하바라타', '안티고네' (미야기 사토시 연출) 등을 공연했다.
'오프(OFF)' 부문에서는 1990년 이후 유키타케 타로의 거리 공연을 시작으로, 1994년 온 시어터 자유 극장의 연극 『스카팽』(몰리에르), 1995년과 1996년 극단 쿠로텐트의 연극 『보이체크』(게오르크 뷔히너), 2015년 개막 페넌트 레이스의 연극 『1969: A Space Odyssey? Oddity!』등 다양한 작품이 공연되었다.
4. 1. 인(IN) 참가
1947년, 배우이자 연출가인 장 빌라르(Jean Vilar)는 아비뇽 교황청 앞뜰에서 야외 연극을 제안했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빌라르는 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연극을 목표로 했다.[1]1947년 9월 4일부터 10일까지 열린 첫 공연은 빌라르가 관객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젊은이들에게 호평을 받아, 여름에 빠질 수 없는 행사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빌라르, 잔 모로, 미셸 부케, 마리아 카사레스, 필립 누아레, 조르주 윌슨, 제라르 필립 등이 출연했다.[1]
1951년부터 1963년까지 빌라르는 파리 국립 민중 극장(Théâtre National Populaire)의 지배인을 겸임했기에, 페스티벌은 옛 교황청 앞뜰에서 국립 민중 극장 단원들에 의해 공연이 이루어졌다.[1]
1964년부터는 다른 연출가들도 초청했다. 1966년에는 모리스 베자르의 『20세기 발레단』(Ballet du XXe siècle)을 초청했고, 1967년에는 고다르의 영화 『중국 여인』을 개봉 전에 상영하기도 했다. 공연장도 늘어갔다.[1]
1968년에는 5월 혁명의 여파가 페스티벌에 미쳤고, 빌라르는 학생들의 항의와 논쟁에 휘말렸다. 그는 1971년에 사망했다.[1]
역대 디렉터는 다음과 같다.[1]
기간 | 이름 |
---|---|
1947년 - 1971년 | 장 빌라르 |
1971년 - 1979년 | Paul Puaux |
1980년 - 1984년 | Bernard Faivre d'Arcier |
1985년 - 1992년 | Alain Crombecque |
1993년 - 2003년 | Bernard Faivre d'Arcier |
2003년 - | 오르탕스 아르샹보(Hortense Archambault)와 뱅상 보드리예(Vincent Baudriller) |
2003년부터는 매년 고문(artiste associé)을 초청하고 있다.
년도 | 이름 |
---|---|
2004년 | Thomas Ostermeier |
2005년 | Jan Fabre |
2006년 | Josef Nadj |
2007년 | Frédéric Fisbach |
2013년 - | Olivier Py |
2003년 인(IN) 참가는 실업 보장법 개정에 반대하는 파업으로 인해 중단되었다.[1]
일본 참가자 및 작품은 다음과 같다.
년도 | 내용 |
---|---|
1994년 | 관세 이에오, 아사미 신슈 등, 창작극 스사노오 (테시가와라 사부로 연출) MATOMA (수잔 바쥬 + 일본인 무용가 + 이치히메 가가쿠회)에 의한 컨템포러리 댄스, 사이와 사이의 사이 신주쿠 료잔파, 연극 '소녀 도시로부터의 절규' |
1998년 | MATOMA (수잔 바쥬 + 일본인 무용가 + 이치히메 가가쿠회)에 의한 컨템포러리 댄스 '사이와 사이의 사이' |
2000년 | 특이한 버섯 무용단, 니브롤 등이 도쿄 현대 컨템포러리 댄스로 소개됨. |
2006년 | 다이라쿠다칸, 무용 유*아소부 (조제프 나지 연출) |
2007년 | 이케다 후미요, 무용 Nine Finger (벨기에의 댄스 컴퍼니의 일원으로서) |
2014년 | SPAC-시즈오카현 무대예술센터, 마하바라타 (미야기 사토시 연출), 실내 (메테를링크 작) (클로드 레지 연출) |
2017년 | SPAC-시즈오카현 무대예술센터, 안티고네 (미야기 사토시 연출) |
4. 2. 오프(OFF) 참가
1964년 연극제 기간에 앙드레 베네데토(André Benedetto)의 자율 공연이 '오프'의 시초로 여겨진다. 이후 오프는 점차 활발해져 1971년에는 38편, 2004년에는 667편, 2007년에는 876편의 작품이 상연되었다.[1]1982년부터 알랭 레오나르(Alain Léonard) 디렉터의 '아비뇽 퍼블릭 오프(Avignon Public Off)' 협회가 종합 프로그램을 편집·배포했다. 또한, 앙드레 베네데토의 '아비뇽 페스티벌과 참가 단체(Avignon Festival et Compagnies)' 조합이 2006년과 2007년의 참가 단체와 공연장을 정리하고, 2008년 참가 신청을 받았다.[1]
1990년 이후 오프(OFF) 참가 내역은 다음과 같다.[1]
연도 | 참가자 | 작품 | 비고 |
---|---|---|---|
1990년 이후 | 유키타케 타로 | 거리 공연, 연속 참가 | |
1994년 | 온 시어터 자유 극장 | 연극 『스카팽』(몰리에르) | 쿠시타 카즈요시 연출 |
1995년, 1996년 | 극단 쿠로텐트 | 연극 『보이체크』(게오르크 뷔히너) | 사토 신 연출 |
1997년 | 갈매기 좌(사토 신 주재의 개인 극단) | 연극 『햄릿/머신』(Heiner Müller|하이네 뮐러영어) | 사토 신 연출 |
1997년 | 극단 DA·M | 연극 『aruku』 | 오하시 히로시 외 연출 |
1998년 | 이데비안 크루 | 댄스 『칼 한 자루』 | 이데 시게타 안무 |
1998년 | 나츠키 마리 | 무용 『인상파 vol.4』 | |
1998년 | NIBROLL 린가에 가자 | 무용 | 야나이하라 미쿠니 안무 |
1999년 | NIBROLL 도쿄 시민 풀 | 무용 | 야나이하라 미쿠니 안무 |
1999년 | 오페라 시어터 곤약좌 | 오페라 『첼로 켜는 고슈』(미야자와 겐지) | 하야시 미츠루 작곡, 가토 나오시 연출 |
1999년 - 2002년 | La Compagnie A-n | 연극 『기도 후에』 | 니시야마 미즈키 구성 |
2000년 | 물과 기름 | 마임 『이마지네르한 인물』 | |
2000년 | 댄스의 코세키 스마코 | ||
2000년, 2001년 | 아트·댄스·시어터·펑션 | 무용 『JORO - Femin』 | |
2000년 이후 | 샤크티의 무용단 | 매년 | |
2001년 | 드문 버섯 무용단 | 무용 『프릴(미니)』 | 이토 치에 안무 |
2001년 이후 | 일본 무용의 하나야기 에이키쿠 | 매년 | |
2002년 | 극단 쿠로텐트 | 연극 『십자군』 | 프로스페르 디스 연출 |
2003년 | Memorial Movement Theatre | 팬터마임 『메시지』 | |
2005년 | 극단 도쿄 건전지 | 연극 『수업』 | 이토 준 연출 |
2006년 | 극단 도쿄 건전지 | 연극 『작은 집과 다섯 명의 신사』(벳쿠 야쿠미) & 연극 『잠들라, 파리』(타케우치 쥬이치로) | 에모토 아키라 연출 |
2007년 | Memorial Movement Theatre | 팬터마임 『색즉시공』 | |
2015년 | 개막 페넌트 레이스 | 연극 『1969: A Space Odyssey? Oddity!』 | 무라이 유우 작·연출 |
2018년 | 공간 기획 | 설치 『Makkanakazitsu - FRUIT ROUGE』 | 나카사 마리카 구성 |
2019년 | 공간 기획 | 설치 『snowdrop』 |
5. 사회적, 정치적 쟁점
아비뇽 연극제는 여러 차례 사회적, 정치적 쟁점과 연관되어 논란이 되었다.
1968년 5월에는 반권위주의 시위 운동의 영향으로 제22회 아비뇽 축제에서 예정되었던 프랑스 공연이 대폭 축소되었다. 2003년에는 공연계 비정규직 노동자("intermittents")들이 보상법 개정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여 축제가 취소되기도 했다. 2014년에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실업 보험 주장을 지지하며 축제 기간 중 파업이 진행되었다.[2]
5. 1. 1968년 5월 혁명
1968년 5월, 반권위주의 시위 운동으로 인해 제22회 아비뇽 축제는 프랑스 공연을 거의 개최하지 못했다. 계획된 공연 수는 총 83개에서 절반으로 줄었다. 비교적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리빙 시어터의 공연, 모리스 베자르의 명예의 전당 공연, 그리고 같은 해 칸 영화제 취소를 활용한 다양한 영화 상영이었다.[1]7월 19일 명예의 전당에서 열린 베자르의 공연은 관람객 사울 고틀립이 베자르에게 공연을 중단하라고 명령하기 위해 무대에 난입하여 방해받았다. 공연이 끝나갈 무렵, "오프(Off)" 축제의 "테아트르 뒤 셴 느와르(Théâtre du Chêne Noir)"의 코미디언들이 무대에 난입하여 베자르의 무용수들이 그들을 중심으로 즉흥적으로 춤을 추게 했다.[1]
5. 2. 2003년, 2014년 파업
2003년에는 공연계 비정규직 노동자("intermittents")들이 보상법 개정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이로 인해 축제가 취소되기 전까지 총 750개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고,[1] "오프" 축제에서도 약 100개의 공연이 취소되었다.[1]2014년 7월 3일, 축제 위원회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실업 보험 주장을 지지하며 행사 기간 중 파업을 지지하는 투표를 진행했다. 투표 결과는 찬성 224표, 반대 110표, 기권 4표였다.[2]
6. 기록 보관소
1947년 장 빌라르가 아비뇽 연극제를 처음 시작한 이후, 장 빌라르의 작품과 총 3,000여 개의 공연에 대한 기록 보관소는 아비뇽 몽테 폴-푸오에 위치한 8, 몽 거리의 장 빌라르 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 건물에는 특히 도서관, 비디오테크, 전시 공간 및 데이터베이스가 있다.[4]
장 빌라르 협회는 연극의 사회적 위치와 연극 제작에 관련된 정치적 쟁점을 분석하며, 축제 기획자의 생각을 현대적인 맥락에서 담아내는 리뷰 저널인 《장 빌라르의 노트》를 발행한다.
참조
[1]
웹사이트
Histoire
http://www.festival-[...]
[2]
뉴스
Judge Authorizes All-Female ''Godot''
https://www.nytimes.[...]
2021-10-06
[3]
웹사이트
Coronavirus: le Festival d'Avignon, prévu en juillet, est annulé
https://www.francetv[...]
France Info
2020-04-13
[4]
웹사이트
Site de la Maison Jean-Vilar
http://maisonjeanvil[...]
2014-07-13
[5]
시사상식
아비뇽 연극제
https://terms.naver.[...]
pmg 지식엔진연구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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